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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문장

남녀간의 속마음

다시 읽는 문장

작성일 26-05-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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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조회 79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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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시 읽는 문장

 

퇴근길, 교보문고 입구였습니다.

사람들 틈을 헤치며 나가려는데, 반대편에서 들어오던 한 여자와 어깨가 살짝 부딪쳤습니다.

본능적으로 사과를 하려 고개를 숙이던 찰나,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무거운 향이 아닌, 비 갠 뒤의 숲 같은 냄새.

20대 시절, 제가 가장 좋아했던 그녀의 향이었습니다.

상대도 멈칫하며 저를 바라보더군요.

 

"서준 선배?"

미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했습니다.

 

눈가에 얇게 잡힌 주름은 오히려 그녀가 지나온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는 듯해 보기 좋았습니다.

반면 제 손목에는 낡은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고,

제 표정에는 오늘 하루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을 겁니다.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가장 평범한 인사를 건넸지만, 공기 중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점 구석의 작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서점에 있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려요."

그녀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미소를 보니, 도서관에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줄을 서던 제 젊은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여전하긴. 그때는 시집을 읽으러 왔고, 지금은 기술 서적이나 재테크 코너를 기웃거리는 게 다르지."

제 대답에 그녀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비웃음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이해하는 동지의 웃음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들 이야기, 하는 일, 그리고 공통으로 알고 있던 친구들의 부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제 손등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선배, 아직도 버릇 못 고쳤네요.

생각 깊어지면 검지로 손등 톡톡 두드리는 거요."

저는 움찔하며 손을 멈췄습니다.

스스로도 잊고 지냈던 오랜 습관을,

20년 만에 만난 사람이 기억해준다는 건 기묘한 감동이더군요.


"그걸 아직 기억해? 난 내가 그러는 줄도 몰랐는데."

"기억하죠. 선배가 그 버릇 나올 때마다

무슨 말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거든요.“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우리 사이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며 일어날 채비를 했습니다.

"사실 저 그때, 선배가 고백해주길 기다렸어요.

근데 선배는 매번 손등만 두드리다 말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정공법에 숨이 턱 막혔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죠.

제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습니다.

"지금 표정도 그때랑 똑같네요.

이젠 늦었어요, 선배. 밥은 제가 살게요.

대신 다음엔 손등 두드리지 말고 그냥 고맙다고 하세요."

그녀는 번호를 남기고 먼저 서점을 나섰습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했고,

어느새 노을이 내려앉은 거리는 20년 전 그날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카페에 앉아 제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바보 같은 대학생이 아니었지만,

성숙해진 만큼 각자의 삶을 지켜내며

추억을 추억으로 남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서점을 나오는 길, 저는 아까 지나쳤던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다시는 읽지 않을 줄 알았던 문장들이

왠지 오늘따라 가슴에 깊이 박힐 것 같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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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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