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티카의 연인들 2편
작성일 26-06-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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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조회 26회 댓글 0건본문
로마에서의 아슬아슬한 동행은 자연스럽게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로 이어졌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내린 두 사람
은 약속이나 한 듯 한 택시에 올랐다. 가짜 배우자들의 눈치
를 보느라 호텔은 각자 다른 곳에 잡았지만, 낮 시간만큼은
완벽한 한 팀이었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코시모
데 메디치가 기부해 세운 ‘산 마르코 미술관’이었다. 2층으
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끝, 교황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
다는 프라 안젤리코의 걸작 ‘수태고지(Annunciation)’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참 지독할 정도로 우아한 파란색이야."
서연이 그림 속 마리아가 입은 옷의 푸른빛에 홀린 듯 다가
서며 말했다.
"이건 천연 청면석을 갈아 만든 '울트라마린'이야. 당시엔 금
값보다 비쌌지. 천사 가브리엘의 날개에 쓰인 화려한 핑크와
금박도 아름답지만, 화가의 눈에는 이 차갑고도 깊은 블루
가 마리아의 신성함과 동시에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인간적
인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처럼 보여. 박 교수
, 역사적으로 이 푸른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민우는 서연의 시선이 머문 푸른 옷자락을 보며 넥타이를 살
짝 늦췄다.
"15세기 피렌체에서 울트라마린을 이 정도로 썼다는 건, 메
디치 가문의 재력이 교황청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정치적 선
언이지. 신성함을 빌려 자신들의 세속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
는 역사적 기획이야. 하지만... 내 눈에는 저 푸른색이 꼭 지
금의 너처럼 보여."
"나처럼? 무슨 뜻이야?"
서연이 고개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
선이 얽혔다.
"비싸고 화려한 '교수'라는 껍데기를 두르고 있지만, 속은 저
울트라마린처럼 시리도록 외로워 보인다는 뜻이지."
민우의 직구에 서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서
연은 이내 화가 특유의 방어기제를 발동했다.
"치, 역사학자라 그런가? 소설을 쓰시네. 우리 남편이 들으면
섭섭하겠어. 얼마나 자상한 사람인데."
서연은 애써 웃으며 가방끈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우 역시 주머니 속에서 가
짜 유부남의 가면을 고쳐 쓰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를 향해 당기는 인력(引力)이 강해질수록, 가짜 족쇄가 주는
압박감 역시 팽팽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피렌체 예술의 정점인 우피치 미술관을
찾았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을 지나, 제18전
시실인 8각형의 방 '트리부나'에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자
코포 폰토르모의 매너리즘 회화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르네상스의 완벽한 균형이 무너지고 매너리즘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의 회화는 참 묘한 쾌감을 줘."
민우가 그림 속 왜곡된 인체의 비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
다.
"역사학자들에게 이 시기는 혼란기야. 스페인과 프랑스의 침
략으로 피렌체의 공화정 체제가 붕괴하던 시대지. 질서와 규
칙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느낀 극도의 불안감이 이 불안
정한 구도와 뒤틀린 포즈에 고스란히 박혀 있어."
서연은 그림 속 강렬한 색채 대비에 시선을 빼앗긴 채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불안감이 시각적으로는 아주 짜릿한 결과를 낳았어. 여기
폰토르모가 쓴 보색 대비를 봐. 차가운 이브닝 블루와 야광
에 가까운 오렌지-핑크의 매치. 이건 이성적인 규칙을 깨부
순 화가의 모험이야. 절대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반대편
의 색들이 만나서 서로를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잖아."
서연이 '절대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반대편'이라는 단어
를 뱉는 순간, 민우는 서연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미술관의
혼잡한 인파 덕분에 두 사람의 어깨가 완전히 밀착되었다.
서연의 살구색 트렌치코트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민우의
후각을 자극했다.
"보색 대비라... 서로 정반대에 있어서 절대 섞일 수 없지만,
나란히 있을 때 가장 빛난다는 그 미술 용어?"
민우의 낮은 목소리가 서연의 귀가에 닿았다.
"어... 맞아. 섞이면 검은색이 되지만, 나란히 두면 서로를 가
장 선명하게 만들지."
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민우의 단단한 어깨가 닿은 곳이
뜨거워졌다. 가짜 유부남과 가짜 유부녀. 결코 섞여서는 안
되는 정반대의 선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역설적으
로 서로를 향한 갈망을 가장 강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우리도 꼭 보색 같네."
민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서연은 대답 대신 그림만 쳐다보
았지만, 그녀의 귀끝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술관을 나온 두 사람은 베키오 다리가 보이는 아르노 강변
을 따라 걸었다. 피렌체의 석양은 온 도시를 붉은 대리석처
럼 물들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두
사람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돌담에 기대섰다.
민우는 배낭에서 로마에서부터 아껴두었던 키안티 와인 한
병과 플라스틱 잔 두 개를 꺼냈다.
"역사학자가 제안하는 피렌체를 가장 완벽하게 기억하는 방
법이야. 이탈리아의 햇살을 머금은 와인을 마시며 브루넬레
스키의 돔을 바라보는 것."
서연은 웃으며 잔을 받았다. 붉은 와인이 채워지고, 두 사람
의 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서연아, 너 대학 때 서양화과 과방 창가에서 매일 크로키북
붙잡고 있었잖아. 기억나?"
민우의 기습적인 추억 소환에 서연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눈을 흘겼다.
"기억나지. 근데 박 교수 너, 그때 내 주변 엄청 맴돌았던 거
알아?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책은 안 보고 맨날 나만 쳐다
보던 시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 알고 있었어?"
민우가 당황해 잔을 떨어뜨릴 뻔하자, 서연이 맑게 웃었다.
"다 알았지, 이 바보야. 그때 넌 고대사 책 뒤에 숨어서 나만
보면 얼굴이 홍당무가 됐잖아. 왜 고백 안 했어?"
민우는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주변엔 늘 멋진 미대 오빠들이 많았고... 난 그냥 촌스러
운 복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널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어."
'지금처럼'이라는 말에 아르노 강의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서연은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15년
전의 타이밍 어긋남이 아쉬우면서도, 지금 이 순간 가짜 성
벽을 치고 마주 앉아 있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때 서연의 백팩 깊은 곳에서 또다시 요란한 진동이 울렸
다. 한국 시간으로 한밤중, 로마에서부터 계속되던 그 번호였
다. 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고 거
절 버튼을 누르는 서연을 보며, 민우는 알 수 없는 질투심과
의구심이 치밀었다.
"남편이야? 주말인데 통화 길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민우의 뼈 있는 질문에 서연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차
갑게 쏘아붙였다.
"강 교수님이야말로 사모님한테 피렌체 야경 사진이라도 보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나랑 이러고 있어?"
서로에게 친 성벽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와 가슴을 찔렀다.
짜릿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운 긴장감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은 채, 붉게 타들어 가는 피렌
체의 야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의 유통기한이 다해
가고 있음을, 두 사람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2편 끝,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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