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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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댓글 1건 조회 80회 작성일 26-05-16 13:38본문
제목 : 묻지마 산악회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드니 주말마다 집구석에 누워 있는 것도 눈치 보이고,
몸은 예전 같지 않아서 큰맘 먹고 등산이나 가볼까 했지.
인터넷을 뒤지다 우연히 ‘가입 조건 없음, 묻지마 산악회’라는 문구를 발견했어.
이름부터 뭔가 묘한 해방감이 느껴지잖아?
아내한테는 “건강을 위해 호연지기를 기르고 오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하고,
장롱 깊숙이 처박아둔 등산복을 꺼내 입었어.
나름 샤프해 보이려고 거울 앞에서 포즈도 좀 잡고 버스 탑승지로 향했지.
근데 버스 문이 열리는 순간, 내 환상은 처참히 깨졌어.
호연지기는 무슨, 버스 안은 이미 이 세상 텐션이 아니었거든.
화려한 원색의 아웃도어 옷을 입은 형님, 누님들이 출발하기도 전부터
소주잔을 돌리며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클럽으로 만들어놨더라고.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비주얼은 내 옆자리에 앉은 ‘독수리 형님’이었어.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브랜드 로고가 도배된,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등산 매장이었지.
그 형님이 나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차대?
“아우, 동생. 옷 핏이 그게 뭐야? 등산은 기세야, 기세! 이리 와서 이거 한 잔 마셔.”
그러면서 종이컵에 가득 채운 막걸리를 내밀더라고.
오전 7시 반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시는 막걸리라니.
안 마시면 내릴 기세라 원샷을 때렸지.
드디어 목적지인 산자락에 도착했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들 번개 같은 속도로 산을 타기 시작하더군.
나도 질 수 없어서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선두 그룹을 따라붙었어.
한 30분쯤 올라갔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
그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어.
아까 버스에서 보았던, 단아한 등산복 차림의 여성이었지.
왕년에 도서관 좀 다녔을 법한 지적인 분위기라 속으로
‘오, 이 산악회에도 이런 분이 있네?’ 하고 내심 감탄했거든?
이름은 수연이라고 하더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숨을 들이마시며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갔어.
“저... 날씨가 참 좋죠? 숨이 차시면 제 페이스에 맞춰서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는데, 숲속에 갑자기 햇살이 비치는 것 같더라고.
"감사해요. 안 그래도 숨이 좀 찼는데, 선배님이 옆에 계시니까 든든하네요."
그 '선배님'이라는 나직한 목소리에 취해, 나는 허리를 더 꼿꼿이 폈어.
마침내 커다란 바위들이 얽혀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났지.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올라갔고, 수연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더라고.
나는 먼저 널찍한 바위 위로 올라선 뒤, 뒤돌아서서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지긋이 내밀었어.
"여기 잡으세요.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시고요."
수연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내 손을 덥석 잡았어.
조금 거칠지만 따뜻한 그녀의 손이 내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르더군.
20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어.
손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과 떨림이, 내 거친 숨소리보다 더 크게 귀에 맴도는 기분이었지.
중턱쯤 올랐을 때, 수연이가 배낭에서 작은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냈어.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았는데, 그녀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더라고.
"향이 참 좋네요. 이런 깊은 산속에서 마시는 커피라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원두예요. 아까 가파른 길에서 선배님이 손 잡아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대접하는 거예요. 선배님 손이 참 따뜻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괜히 쑥스러워 커피만 들이켰지.
우리는 벤치에 앉아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 그리고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꿈까지.
나이가 들면서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그녀와 나누는 대화의 매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지.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스쳐 지나갔어.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과 산줄기는 장관이었어.
다들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는 와중에, 수연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서더군.
"선배님, 우리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
그녀의 제안에 독수리 형님이 잽싸게 수연이의 폰를 뺏어 들었어.
"어이, 두 사람! 기세를 살려서 좀 더 가까이 붙어봐!"
형님의 짓궂은 외침에 수연이가 수줍게 웃으며 내 어깨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어.
아까 손을 맞잡았을 때의 그 온기가 다시 한 번 어깨를 통해 밀려오는데,
사진 속 내 표정은 긴장해서 굳어 있었지만 내 눈은 분명 행복하게 빛나고 있었을 거야.
하산하는 길, 독수리 형님이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치며 기분 좋게 윙크를 하더군.
"동생, 오늘 산의 정기를 제대로 받았네? 내려가서 도토리묵에 파전은 내가 쏠 테니까,
수연씨 에스코트 잘해드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누웠는데 수연이한테서 문자가 왔어.
[선배님, 오늘 덕분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즐겁게 올라갔어요.
특히 가파른 길에서 손 잡아주셨을 때 정말 든든했습니다.
다음 주에도 같이 가주실 거죠? 그땐 제가 더 맛있는 커피 챙겨갈게요.]
나는 그 문자를 소중하게 읽고 또 읽으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실실 웃었지.
다음 주? 당연히 가야지.
이번에는 기세가 아니라, 그녀와 나란히 손을 맞잡고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걸음으로 산을 오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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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는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는 김산 님!
아웃도어는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는 김산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