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굴절 > 남녀간의 속마음

본문 바로가기

남녀간의 속마음

일곱 번째 굴절

페이지 정보

작성자 피병두작가 댓글 0건 조회 74회 작성일 26-05-24 21:14

본문

일곱 번째 굴절



1. 비를 파는 상점


도심의 지하상가 가장 구석진 곳에는 간판도 없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코끝을 찌르는 흙 내음과 함께 

사방에 진열된 유리병들이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했다

병 속에는 각기 다른 농도와 질감을 가진 ()’가 담겨 있었다

오월의 이른 아침에 내린 여우비’, ‘런던의 회색 안개비’, ‘열대 야자수 잎을 때리던 스콜같은 라벨이 붙은 채로

그곳의 주인인 서우는 사람들의 기억이나 감정을 특정한 날씨와 배합해 

유리병에 담아내는 기묘한 조향사였다.

 

어느 날 저녁, 마감 직전의 상점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것은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그의 이름은 민우. 잘 나가는 건축가였지만

최근 몇 달간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모든 프로젝트를 망치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눈 밑은 튄 먹물처럼 어두웠고, 온몸에서는 지독한 피로와 환멸의 냄새가 났다.

 

"여기가 남은 감정이라도 쥐어짜서 영감을 만들어준다는 그곳입니까?"

민우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세웠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영감을 만들어내진 못합니다. 다만, 당신이 어디에 두고 온 것을 다시 보게 해줄 수는 있죠."

"말장난은 관두고, 가장 강력한 걸로 주십시오

당장 내일 아침까지 새 기획안을 내지 못하면 난 끝장입니다

완전히 새롭고, 강렬하며, 세상에 없는 색을 보고 싶습니다.“

 

서우는 잠시 사내의 메마른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카운터 아래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아무런 라벨도 붙지 않은 투명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건비어 있잖습니까?"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너무 가득 차서 투명해진 겁니다

빛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이건 '일곱 번째 굴절'이라고 부르는 비입니다.“

"어떻게 쓰면 됩니까?“

"눈을 감고, 당신이 가장 순수하게 무언가를 열망했던 기억 위에 이 비를 뿌리십시오

그리고 기억의 태양이 떠오를 때, 눈을 뜨면 됩니다

가격은당신이 보게 될 가장 아름다운 색 한 조각입니다."

민우는 코웃음을 치며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던지듯 내려놓고 병을 채 가듯 들고 나갔다

서우는 수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사내가 남기고 간 서늘한 공기를 가만히 쓸어 담았다.

 

2. 프리즘의 세계

 

작업실로 돌아온 민우는 책상 위에 호리병을 올려두었다

시계 바늘은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모니터 속 하얀 캐드(CAD) 도면은 여전히 유령처럼 비어 있었다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민우는 서우가 말한 대로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며 진공상태가 된 듯한 이명이 찾아왔다

향기도, 소리도 없었지만 피부에 닿는 감각만큼은 분명했다

그것은 지독하게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온몸을 태울 듯 뜨거운 습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장 순수하게 무언가를 열망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억지로 끄집어낸 기억은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기 위해 밤을 새우던 날이었다

돈도, 명예도 모르던 시절, 오직 내 손으로 세상에 없던 아름다운 공간을 짓겠다는 열정 하나로 

손가락이 부러져라 연필을 굴리던 청춘의 한 자락.

 

기억 속의 자신이 밤샘 작업을 마치고 작업실 창문을 열었을 때

야속하게도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민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하필 비야. 날이 개어야 내 건물이 빛을 받을 텐데.'

그 순간, 호리병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비가 기억 속의 장대비와 섞이기 시작했다.

 

콰르릉-!

뇌리를 때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기억 속의 하늘이 쩍하고 갈라졌다

그리고 먹구름 사이로 비현실적인 광선 한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거대한 프리즘이 되어 그 빛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고 생각했지만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그의 작업실은 사라지고,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빛의 터널' 한가운데 서 있었다.

 

3. 유치하지 않은 천연색(天然色)


우리가 흔히 아는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예쁜 일곱 색깔 줄무늬다

유치원 벽면에 그려진, 혹은 동화책 표지에 나오는 다정한 아치형의 그것.

하지만 민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결코 다정하거나 아기자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폭력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다가온 '()'은 달콤한 사과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행성의 충돌이나 용암의 분출을 연상케 하는, 지독할 정도로 원시적인 생명력의 폭발이었다붉은 빛이 민우의 온몸을 감싸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은 따스한 햇살이 아니라, 눈을 멀게 만들 것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의 핵 그 자체였다빛들은 선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거대한 파도처럼 소용돌이치고, 서로를 집어삼키며 굴절되고 있었다.

"이게무지개라고?"

민우는 신음했다과학 교과서가 박제해 놓은 빛의 스펙트럼은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가공된 초라한 요약본에 불과했다진짜 무지개는 빛과 물이 우주 공간에서 벌이는 가장 치열하고 거친 전쟁터였다.

 

특히 '()'의 구역에 들어섰을 때, 민우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상 그 어떤 바다도 품어본 적 없는 깊이의 심연이었다

차갑다 못해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서슬 퍼런 푸름

그 푸른 빛의 파편들이 민우의 굳어있던 뇌세포 구석구석을 찌르고 들어와 박혔다.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죽어 있던 그의 감각들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빛들은 정형화된 아치가 아니라

기하학적인 곡선과 나선형의 탑을 이루며 끊임없이 붕괴하고 재건되었다

건축가로서의 민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평생 짓고 싶었던 궁극의 구조물이 바로 이 빛의 굴절 속에 있다는 것을.

그는 미친 듯이 그 빛의 구조를 눈에 담았다

선과 면, 명암과 채도가 뒤섞인 초차원의 설계를 뇌리에 새겨 넣었다.

 

4. 일곱 번째 굴절

 

마지막 '보라()'의 장막을 넘어설 때쯤, 빛의 기둥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하나의 거대한 문()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지개의 종착지이자, 일곱 번의 굴절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그 문 앞에, 상점 주인인 서우가 가만히 서 있었다

현실의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그의 몸은 반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없는 색을 보았습니까?"

"아니요."

민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경이로움과 공포가 뒤섞인 눈물이었다.

 

"세상에 없는 색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세상에 가득 차 있었는데, 내가 장님이 되어서 보지 못했던 색들이었습니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고작 콘크리트 덩어리에 페인트나 바르면서 최고라고 자만했다니."

"원래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작아지는 법입니다.“

 

서우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계약을 이행하셔야죠.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색 한 조각을 받겠습니다."

민우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빛나던, 심연을 닮은 푸른빛의 파편 하나가 

체온과 함께 빠져나와 서우의 손바닥 위로 옮겨갔다

그 빛이 빠져나가자 민우는 묘한 해방감과 함께 깊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 색이 없으면, 난 이제 그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겁니까?"

"아니요, 당신은 이미 전체를 보았습니다

한 조각을 잃었다고 해서 전체가 사라지진 않죠. 다만"

서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당신이 지을 건물에는 항상 기묘한 푸른빛의 그늘이 지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그 그늘 아래서 이유 없는 평온을 느끼겠지요.“


5. 무지개가 지나간 자리


"팀장님! 팀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깨를 흔드는 거친 손길에 민우는 번쩍 눈을 떴다. 

사방이 환했다. 도면을 검토하러 온 조수 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우, 깜짝 놀랐잖아요. 책상에 엎어져서 꿈을 무슨 고함까지 지르면서 주무세요? 

회의 한 시간 전입니다. 기획안은요…?"

대리의 시선이 민우의 손끝으로 향했다. 

민우는 자신이 언제 쥐었는지도 모를 태블릿 펜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는, 평소의 민우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파격적이고 거친 곡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건축 도면이 완성되어 있었다.

빛의 투과율과 굴절을 극대화하여, 비가 오고 해가 뜨는 날씨에 따라 건물의 색깔과 형태가 

완전히 달라지도록 설계된, 그야말로 '살아있는 무지개' 같은 미술관 도면이었다.

"와……."

대리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질린 듯한 감탄사였다. 민우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맑았고, 가슴속을 짓누르던 슬럼프의 돌덩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팀장님, 근데 이 건물 정중앙을 관통하는 이 거대한 유리 기둥은 무슨 색으로 마감하실 건가요? 

여기만 색상 지정이 비어 있는데…."

대리의 질문에 민우는 창밖을 내보았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빌딩 숲 사이로 맑은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문득 그는 어젯밤 지하상가의 기억이 떠올라 외투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 속에는 작은 유리 호리병이 들어 있었다.

병 안에는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던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물방울에는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푸른색'만큼은 비치지 않았다. 

빨강, 노랑, 초록… 다른 색들은 찬란하게 빛나는데, 

오직 푸른색이 있어야 할 자리만 마법처럼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민우는 엷게 웃으며 태블릿 화면 위, 비어 있는 중심부에 펜을 갖다 댔다.

"여긴 색을 칠하지 않을 거야." 

"네? 그냥 투명하게요?" "아니. 비워둘 거야. 

비가 내리고 태양이 가장 뜨겁게 작열하는 날, 하늘이 알아서 채워주도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곱 번째 굴절로 말이지."


사무실 창밖, 멀리 피어오르는 미약한 무지개를 바라보며 민우는 

마침내 진정한 영감의 의미를 깨달았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빛이 지나갈 자리를 깨끗하게 비워두는 것. 

그것이 그가 무지개의 폭력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배워온 진짜 건축이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06건 1 페이지
남녀간의 속마음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열람중 피병두작가 75 0 05-24
105 피병두작가 72 1 05-24
104 김연희작가 90 0 05-24
103 김연희작가 177 2 05-19
102 김연희작가 200 1 05-17
101 김연희작가 235 1 05-16
100 김연희작가 196 1 05-15
99 김연희작가 274 2 05-14
98 익명 166 0 04-07
97 익명 330 0 12-24
96
퀴즈 댓글7
익명 516 0 11-10
95 익명 595 0 07-31
94
. 댓글6
익명 574 1 07-27
93
퀴즈 댓글2
익명 1218 0 07-30
92 익명 923 0 06-10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현재 접속자 수 : 38명

Copyright © 미즈위드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