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과수원과 뻐꾸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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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댓글 0건 조회 59회 작성일 26-05-26 07:49본문
달빛 과수원과 뻐꾸기 소리
1. 진달래 피던 봄날과 투명했던 시냇가
눈을 감으면 지금도 아스라히 손에 잡힐 듯한 풍경이 있어.
봄이면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진달래,
여름이면 바지춤이 젖는 줄도 모르고 첨벙거리던 시냇가.
그곳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살고 있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면,
동네 꼬마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뒷산으로 향했어.
지천으로 깔린 진달래꽃은 훌륭한 놀잇감이이자 달콤한 간식거리였지.
"야, 이건 독 없다! 먹어도 돼!"
조금이라도 더 진한 분홍빛을 띤 꽃송이를 찾아 입에 넣으면,
쌉싸름하면서도 끝맛은 은은하게 달콤한 봄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어.
서로의 입술이 진달래 꽃물로 발갛게 물든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저 마주 보며 깔깔대기 바빴지.
입술이 더 빨간 사람이 이기는 거라며 우기던
그 순수한 내기는 봄날의 가장 큰 축제였어.
봄이 가고 싱그러운 초록이 짙어질 무렵,
우리의 놀이터는 자연스럽게 마을 앞 시냇가로 옮겨갔어.
특별한 장난감 하나 없어도 물가에만 가면 하루가 너무 짧았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이고 물장구를 치다 보면
엉덩이까지 축축하게 젖기 일쑤였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어.
돌멩이를 들추어 조그만 가재를 잡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피라미를 쫓다 보면
시간은 마법처럼 흘러갔어.
가끔은 나무 위를 번개처럼 날아다니는 청청한 다람쥐를 발견하고는,
잡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다람쥐 잡자!" 하고
온 산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쫓아가곤 했지.
다람쥐는 비웃기라도 하듯 도토리나무 위에서 꼬리를 살랑였고,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잔디밭에 대자로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어.
그 시절의 하늘은 왜 그리도 높고 맑았는지 몰라.
2. 한여름 밤의 위험한 모의
계절의 바퀴가 굴러 한여름에 들어서면,
시골의 낮은 매미 소리로 터질 듯했어.
하지만 진짜 모험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는 밤에 시작되었지.
그 시절 여름 밤은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바람도 귀해,
동네 어른들은 마당에 평상을 깔고 모닥불을 피워 모기를 쫓으며 부채질을 하셨어.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 골목길 가로등 밑으로 하나둘씩 정예 멤버들이 모여들었지.
행동대장 철이: 날렵하고 겁이 없어 담장 넘기의 명수.
망잡이 순돌이: 귀가 밝고 눈치가 빨라 작은 인기척도 귀신같이 알아챔.
바람잡이 나: 심장은 콩알만 하지만 먹성이 좋아 늘 합류함.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과일 향기는 우리의 본능을 자극했어.
이웃집 담장 너머로 탐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
밭바닥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박과 참외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지.
"오늘 밤 타깃은 이장님네 복숭아밭이다. 다들 준비됐지?"
철이의 낮은 목소리에 우리들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어.
사실 시장에 가면 몇 가지만 주면 살 수 있는 과일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목표물을 쟁취하는 '스릴'과 '모험'이었어.
우리는 각자 집에서 챙겨온 허름한 포대 자루를 품에 꼭 안은 채,
고양이 걸음으로 어둠 속을 향해 기어갔지.
3. 달빛 아래 펼쳐진 서리 대작전
이장님네 복숭아밭은 동네에서도 가장 목이 좋은 곳에 있었어.
탐스러운 백도가 가지가 찢어질 듯 매달려 있었는데,
밤공기를 타고 흐르는 그 달콤한 향내는 멀리서도 침을 고이게 만들었지.
"순돌이는 저기 나무 뒤에서 망보고, 나랑 철이가 들어간다.
신호 알지? 부엉이 소리 두 번이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어.
철이가 먼저 가볍게 과수원 울타리를 넘었고, 나도 뒤따라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지.
손을 뻗어 만진 복숭아는 밤이슬을 맞아 촉촉하고 부드러웠어.
솜털이 서린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따서 품에 안았어.
욕심을 부려 자루에 마구 담으려던 순간, 저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지.
"뻐꾹! 뻐꾹!"
원래 신호는 부엉이였는데, 너무 당황한 순돌이가 그만 뻐꾸기 소리를 내고 만 거야.
한여름 밤에 뻐꾸기라니!
그와 동시에 밭 저편에서 손전등의 강한 불빛이 번쩍이며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어.
"에끼 이 녀석들! 거기 누구냐! 또 복숭아 도둑놈들이구만!"
이장님 목소리였어. 우리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지.
품에 안은 복숭아가 떨어질까 봐 옷자락을 꼭 쥐고, 가시덤불에 긁히는 줄도 모른 채 달렸어.
철이는 날쌔게 도망쳤지만, 발이 느린 나는 그만 밭둑에 걸려 보기 좋게 고꾸라지고 말았지.
"에구구..." 소리를 내며 일어설 때, 손전등 불빛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어.
다 잡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지.
그런데 이장님은 내 덜덜 떨리는 뒷덜미를 잡는 대신, 툭툭 먼지를 털어주며 헛기침을 하셨어.
"녀석, 도망을 가려면 제대로 가던가. 가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자, 이거 가져가서 애들이랑 나눠 먹어라."
이장님은 당신의 넓은 품에서 미리 따놓으신 듯한 커다랗고 잘 익은 수박 한 통과
참외 몇 개를 내 품에 턱 안겨주셨어. 다 알고 계셨던 거야.
자식 같은 동네 꼬마들의 장난기 어린 서리를,
어른들은 그저 귀여운 여름날의 풍경으로 눈감아주셨던 거지.
4. 평상 위의 만찬, 그리고 그리운 잔상
도망쳤던 철이와 순돌이가 슬며시 골목 끝에서 나타났어.
내 손에 들린 커다란 수박과 참외, 그리고 품속에 무사히 살아남은 복숭아 몇 알을 보고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
우리는 동네 어귀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평상으로 모였어.
칼도 없었기에 수박을 바닥에 쾅 하고 내리쳐 쪼겠지.
"콰악" 소리와 함께 빨간 속살을 드러낸 수박은 설탕을 뿌린 듯 달고 시원했어.
서리로 훔쳐 온 과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그 시절의 격언은 역시나 진리였어.
이장님께 들켜 가슴 졸였던 순간의 스릴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그날 밤 먹은 수박과 참외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남았지.
입가에 수박 씨를 까맣게 붙인 채, 복숭아 털 때문에 목덜미가 가려워 긁어대면서도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웃었어.
밤하늘엔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은하수가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고,
풀숲에서는 베짱이와 귀뚜라미가 우리들의 만찬을 축하하듯 연주를 해주었지.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서리'는 범죄라기보다는, 온 동네가 함께 아이들을 키우던
넉넉한 인심과 해학이 있던 시절의 아름다운 풍속이었어.
어른들은 알면서 속아주고, 아이들은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짜릿한 추억을 만들던 시절.
이제는 마트에서 언제든 깔끔하게 포장된 과일을 살 수 있고,
시골의 그 시냇가는 콘크리트 둑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진달래 향기가 나고,
한여름 밤 수박을 깨먹던 그 시절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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