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알고리즘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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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4회 작성일 26-08-19 13:59본문
이른 아침의 스튜디오는 조용했다. 차가운 창문 너머로 도심의 마천루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 서율은 커피잔을 손에 쥐고 모니터를 노르스름하게 채우고 있는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잘나가는 웹소설 작가였다. 수많은 독자들의 밤을 지새우게 만든 히트작이 여럿이었지만, 이번 신작만큼은 시작부터 꼬여가고 있었다. 남주인공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차갑고 현실성이 없다는 담당 편집자의 지적 때문이었다.
“조 작가님, 남주가 너무 기계 같아요. 진짜 사랑에 빠져본 적 없는 사람 같다고요.”
편집자의 그 말이 뼈를 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았다. 서율의 연애 세포는 이미 수년 전에 죽어버렸다. 소설 속 감정선은 모두 계산된 공식일 뿐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도현'. 최근 한 달간 데이팅 앱을 통해 알게 된 남자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서율의 심장을 미묘하게 흔들어놓는 이상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 오늘 저녁 7시, 지난번에 말했던 그 카페에서 볼까요? 드디어 얼굴 보겠네요.
서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글이 막힐 때마다 충동적으로 이어갔던 대화였다. 그러나 막상 만나자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화면 뒤에 숨어 따뜻한 말을 건네던 그 남자가, 현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면 어쩌지?
― 좋아요. 7시에 봬요.
답장을 보낸 서율은 모니터를 닫고 옷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는 조용한 골목길 끝에 위치한 오래된 카페였다. 은은한 재즈 음악과 쌉싸름한 원두 향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서율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손가락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7시 정각. 유리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코트를 단정하게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다 서율과 눈이 마주쳤다. 선이 고운 얼굴, 깊은 눈빛. 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사진보다 훨씬 근사한 실물이었다.
“조서율 씨?”
그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마저 낮고 울림이 있었다.
“네... 도현 씨?”
“반가워요. 많이 기다렸어요?”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코트를 벗었다. 그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서율에게는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잘 통했다. 좋아하는 영화, 평소의 생각, 그리고 소소한 취향까지.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율 씨 글 쓰는 일 하신다고 했죠?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해요.”
도현이 턱을 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엔 진심 어린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냥... 로맨스 소설이에요. 요즘은 슬럼프지만요.”
“왜요? 글이 잘 안 풀려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뛰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서율이 자조적으로 웃자, 도현이 가만히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가웠던 서율의 손끝으로 온기가 찌르르하게 전해졌다.
“이제 알게 될 것 같은데.”
도현의 나이키 모양 미소와 눈빛에 서율의 심장이 요동쳤다.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완벽한 남주인공이 현실로 걸어 나온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밤늦도록 거리를 걸었고, 서율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설렘이라는 감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날 이후, 서율의 소설은 거침없이 써 내려가지기 시작했다. 도현과의 데이트가 거듭될수록 소설 속 남주인공의 감정선은 생생하게 살아났다. 도현이 건넨 말, 그가 서율을 바라보던 눈빛, 손을 잡았을 때의 체온이 모두 소설의 명장면이 되었다.
도현은 완벽한 연인이었다. 서율이 바쁜 날에는 말없이 작업실 앞에 맛있는 음식을 두고 갔고, 서율이 우울해할 때는 밤하늘의 별을 보러 기습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도현 씨를 만나고 내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어느 날 저녁,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서율이 고백하듯 말했다.
도현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나도 그래요, 서율 씨. 당신은 내게 너무 특별한 존재예요.”
하지만 그 완벽함 속에서 서율은 종종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도현은 자신의 과거나 가족,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IT 관련 프리랜서'라고만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서율이 소설에 새로 추가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나 행동을 도현이 마치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똑같이 재현할 때가 있었다.
'내가 소설에 쓸 만큼 도현 씨에게 푹 빠져있어서 환각을 느끼는 걸까?'
서율은 고개를 흔들며 의심을 털어내려 했다. 지금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소설의 완결을 앞둔 어느 날 밤, 서율은 도현의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었다. 도현이 잠시 와인을 가지러 주방으로 간 사이, 그의 노트북 화면이 반짝였다. 서율은 무심코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그녀가 오늘 아침 출판사로 보낸 소설 원고 파일이 열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면 옆에는 이상한 프로그램 창이 떠 있었다.
[프로젝트: 딥 러닝 로맨스 - 조서율 작가 감정 패턴 데이터 수집 98% 완료]
서율의 머릿속이 흰 도화지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손이 떨렸다. 그녀는 홀린 듯 마우스를 잡아 폴더들을 열어보았다.
폴더 안에는 서율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SNS 비밀 계정, 그녀가 작성했던 신작 구상 노트, 심지어 그녀의 일기장 스캔본까지. 그리고 '행동 지침서'라는 이름의 문서가 눈에 띄었다.
- 1차 접촉: 카페 '아날로그' (완료)
- 미션 1: 손을 잡으며 '이제 알게 될 것 같은데' 대사 시전 (완료 - 대상의 심박수 120 달성)
- 미션 2: 소설 15장 내용에 맞춰 밤하늘 별 보러 가기 (완료)
- 최종 목표: 완벽한 서사의 로맨스 소설 완결 도출 및 인공지능 감정 모델 데이터 완성
서율은 숨이 막혀왔다. 지금까지 자신이 느꼈던 그 짜릿한 설렘, 운명 같은 만남, 밤을 지새우며 썼던 뜨거운 감정들이 전부... 철저하게 계산된 '실험'이었단 말인가?
“서율 씨?”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율은 털썩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와인 잔 두 개를 들고 서 있는 도현의 얼굴에는 평소의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이제는 끔찍한 공포로 다가왔다.
“이게... 이게 다 뭐야?”
서율이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도현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봤군요.”
“당신... 누구야? 날 속인 거야? 날 연구 대상으로 삼은 거냐고!”
서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배신감과 수치심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쓴 소설의 완벽한 남주인공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조종하고 관찰하던 사기꾼에 불과했다니.
도현이 서율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서율은 뒷걸음질 쳤다.
“서율 씨, 설명할게요. 처음엔... 그래요, 맞아요. 처음엔 프로젝트였어요.”
도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회사는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알고리즘을 개발 중이었고, 슬럼프에 빠진 로맨스 작가인 당신이 완벽한 타겟이었죠. 당신의 모든 취향, 네가 꿈꾸는 남성상, 소설 속 이상형을 분석해서 내가 그 역할을 연기한 겁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하지만!”
도현이 서율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과 다른, 계산되지 않은 진실된 경련이 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데이터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웃을 때 내 심장 박동 수가 알고리즘의 예측 범위를 벗어났고,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 내 머릿속 지침서들은 전부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고요!”
“거짓말마. 그것도 다 계산된 대사겠지!”
“아니야!”
도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가 오늘 아침 상사에게 보낸 이메일이 떠 있었다.
[프로젝트 중단 요청서: 대상에 대한 사적인 감정 개입으로 인해 데이터의 객관성이 파괴됨. 본인은 오늘 부로 퇴사합니다.]
“나는 당신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지만, 결국 당신이 만든 소설 속으로 내가 진짜 걸어 들어가 버린 겁니다. 서율 씨, 난 지금 당신을... 내 의지로 사랑하고 있어요.”
스튜디오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서율은 도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알고리즘이 만들어낼 수 없는 불안함과 절박함, 그리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장 완벽하게 연출된 거짓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진실된 사랑이 싹튼 것이었다.
서율은 도현의 손을 뿌리치고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작 소설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그녀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눈물을 닦아내며 마지막 문단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를 속이기 위해 연극을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를 쓰기 위해 그 연극에 기꺼이 속아주었다. 시작은 완벽한 거짓이었으나, 끝내 두 사람이 흘린 눈물만큼은 진짜였다.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만,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타이핑을 마친 서율이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 뒤를 돌아 도현을 바라보며 나비처럼 옅게 미소를 지었다.
“소설은 오늘 완결됐어요, 도현 씨.”
서율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이제... 소설 밖의 진짜 당신을 보여줄래요?”
도현의 얼굴에 안도와 환희가 뒤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가 서율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만큼은 그 어떤 데이터도, 알고리즘도 예측하지 못한 온전히 두 사람만의 짜릿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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