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티카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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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26-06-21 07:18본문
팔라틴 언덕 너머로 로마의 태양이 붉은 핏빛을 뿜어내며 저물어 갈 때, 강민우는 기둥만 남은 사투르누스 신전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서양사를 전공한 교수로서 매 학기 강단에서 설명하던 고대 로마의 심장부였지만, 안식년을 맞아 홀로 찾은 포로 로마노의 공기는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중압감으로 그를 압도했다.
그때, 저 멀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아치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빛바랜 대리석 기둥들의 비례감을 찬찬히 뜯어보듯 고개를 든 여자. 민우는 그 자리에서 호흡을 멈췄다. 15년 전, 대학 시절 내내 학과 도서관 창가에서 그의 시선 끝에 머물렀던 서양화과의 만인의 뮤즈, 이서연이었다.
"서연... 이서연 교수?"
바람에 흩날리는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던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낯선 이국땅, 그것도 고대 유적의 잔해 한복판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색에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 강민우?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두 사람은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 민우는 역사 서적 뒤에 숨어 그녀의 크로키북을 훔쳐보던 소심한 짝사랑의 주인공이었고, 서연은 언제나 화려한 캔버스 중심에 있던 사람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흘러간 세월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 대학 교수가 되었고, 또 각자 결혼과 이혼이라는 삶의 굴곡을 겪었다.
"학회 마칠 겸 안식년 초입이라 로마에 왔어. 너는?"
"나도... 이번 학기 안식년이라 미술관들 좀 둘러보려고 왔지."
반가움이 파도처럼 밀려온 순간, 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왼손 약지를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반년 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완전히 혼자가 된 상태였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첫사랑 앞에서 '실패한 이혼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묘한 자존심이 발동했다.
"여전하네. 주말에 남편분이 혼자 유럽 여행도 보내주고, 아주 쿨하신 분인가 봐?“
민우가 짐짓 덤덤한 척 던진 말에 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연 역시 1년 전 지루한 소송 끝에 종지부를 찍은 이혼녀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이자 어엿한 동료 교수인 민우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아주 자상해. 이번 여행도 그 사람이 적극 추천해 준 거야. 강 교수님이야말로 사모님이 혼자 로마 보내주신 거 보면 여전히 사랑받고 사나 봐?“
"하하, 우리 집 사람이야 워낙 개인 시간을 존중해 주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눈앞에 거대한 '가짜 배우자'라는 성벽을 쌓아 올린 채,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고대 로마의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바티칸 미술관에서 다시 만났다. 지독하게 복잡한 바티칸의 미로 속에서도 두 교수의 걸음걸이는 일반 관광객들과 달랐다. 그들은 회랑의 벽면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 앞에서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앞. 민우가 벽면 가득 채워진 고대 철학자들의 군상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있지.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이 방을 자신의 서재로 쓰면서 라파엘로에게 이 그림을 주문했을 때, 그건 단순한 이교도 철학의 부활이 아니었어. 교황청의 신학적 정당성을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 위로 연결하려는 치밀한 정치적, 역사적 텍스트가 숨어 있는 거지. 화려한 르네상스의 정점에서 탄생한 완벽한 인문학적 기획이랄까.“
서연은 팔짱을 낀 채 그림의 하단, 계단에 널브러져 있는 디오게네스의 신체 곡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역사학자의 텍스트 분석도 흥미롭지만, 화가의 눈에는 라파엘로가 구현한 이 완벽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의 입체감이 먼저 들어와. 이 거대한 벽면에 소실점 하나를 찍고 완벽한 대칭 구조를 만들어 낸 건, 당시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시각적 오만함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야. 특히 이 그림 속 인물들의 옷자락에 쓰인 청색과 황색의 보색 대비를 봐.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인물의 양감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이건 철저히 계산된 광학의 승리야."
"시각적 오만함이라...“
민우는 서연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완벽한 원근법과 계산된 보색 대비로 짜인 그림처럼, 지금 자신과 서연이 나누는 대화 역시 철저히 계산된 '유부남, 유부녀'의 경계 안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 내 분석에 반론 있어, 박사님?"
서연이 장난스럽게 눈을 맞추며 묻자, 민우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아니, 서양화과 교수님의 실시간 라이브 도슨트를 들으니 역사학자로서 신선한 자극이 돼서 그렇지. 다음 방으로 갈까?“
바티칸의 백미는 단연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쿠폴라 아래로 쏟아지는 공중의 빛무리가 성당 내부의 황금빛 대리석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정말 지독한 완벽주의자야."
민우가 대성당의 중앙 제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브라마테의 최초 설계안을 미켈란젤로가 그리스 십자가 구조로 변경하면서 이 거대한 공간의 중심성을 확보했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대성당의 건축 기간은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폭풍우와 겹쳐 있어.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던 시기에, 건축을 통해 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시각적으로 증명해야만 했던 절박함이 이 거대한 기둥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셈이야.“
서연은 성당 한구석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 멈춰 섰다. 방탄유리 너머로 보이는 마리아의 슬픔은 차가운 대리석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난 미켈란젤로가 이 차가운 돌에서 어떻게 이런 부드러운 옷자락의 음영을 만들어 냈는지 볼 때마다 경이로워."
서연이 유리창에 가까이 다가가며 조용히 속삭였다.
"마리아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잖아. 평생 고독했던 천재가 신 앞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유일한 오만이자 결핍의 표현이지. 완벽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면 위에 떨어지는 이 빛과 그림자의 대비는, 인간이 가진 가장 깊은 슬픔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승화시킨 예술의 극치야.“
서연의 시선이 마리아의 슬픈 얼굴에 머물 때, 민우는 그녀의 옆모습에서 묘한 쓸쓸함을 읽었다. 신 앞에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결핍. 어쩌면 서연 역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에 생긴 거대한 결핍을 감추기 위해 더 화려하고 지적인 껍데기를 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역사학자 특유의 직감이 발동했다.
성당을 나오는 길, 광장으로 나서는 문턱에서 서연의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서연은 찰나의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액션을 취하지 않고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전화 안 받아? 남편분이 걱정하시겠네.“
민우의 질문에 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 지퍼를 닫았다.
"아니, 별일 아니야. 시차가 안 맞아서 나중에 연락하려고. 민우 너야말로 사모님한테 로마 도착 보고는 제대로 한 거야?"
"그럼, 우린 서로 쿨하게 며칠에 한 번씩만 연락하기로 해서 괜찮아.“
태연하게 거짓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등 뒤로, 고대 로마의 거대한 대리석 광장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로에게 더 깊이 다가가고 싶지만, 스스로 채워둔 '유부'라는 가짜 족쇄 때문에 선을 넘지 못하는 두 남녀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이제 피렌체로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편 끝,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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