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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티카의 연인들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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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6-06-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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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아르노 강변의 그 서늘했던 저녁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뚝 끊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민우는 제 손으로 쳐놓은 가짜 울타

리가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역사를 연구하

며 수많은 영웅의 오판과 몰락을 들여다보았건만,

정작 제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가짜 유부남'

라는 오판을 내릴 줄이야.

 

서울은 지독한 장마철이었다. 대학 교정의 울창한

플라타너스 잎사귀 위로 쉴 새 없이 거친 빗줄기가

때려 박히던 오후, 민우는 연구실 창가에 서서 멍

하니 빗물에 흐려지는 도심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피렌체의 그 뜨거웠던 노을과, 제 시선을 피하던 서연의 쓸쓸한 옆모습이 맴돌았다. 15전 소심하게 짝사랑만 하던 스물셋의 강민우와, 처받기 싫어 거짓말을 늘어놓은 마흔 중반의 강민우는 어쩌면 이리도 다를 바가 없는지, 자괴감이 밀려왔다.


바로 그때, 책상 위 핸드폰이 진동했다.

[성곡미술관 안쪽 카페테라스. 시간 괜찮으면 잠깐

볼 수 있을까?]

민우는 앞뒤 재지 않고 우산을 챙겨 들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거리를 뚫고 도착한 카페. 정원이 내다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서연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식어가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파문을 묵묵히 응시하고있었다.


민우가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지만, 서연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피렌체에서의 그 아슬아슬했던

텐션은 간데없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장마철의 습한

공기만큼이나 무겁고 진지한 침묵이 흘렀다.

 

"서울에서 보니까 또 새롭네, 이서연 교수."

민우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며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서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민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굳은 결심을 한 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야. 나 피렌체에서 마지막 날, 너한테 짜증 냈던 거... 사과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아니야, 내가 눈치 없이 굴었지. 남편분이랑 통화해야 하는데..."

"아니, 남편 없어."

서연의 단호한 한마디가 민우의 말을 뚝 끊어놓았. 쿠궁하는 천둥소리가 카페 유리창을 울렸다.

 

 

민우가 멍한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가방 속에서 부르르 떨리던 그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로마에서부터 계속 울리던 그 전화... 남편 아니야

1년 전에 끝난 전남편 측 변호사 연락이었거나, 자 이국땅에 가 있는 내가 걱정돼서 잠 못 자던 우리 엄마 전화였어. 나 사실... 이혼했어, 민우야.“

 서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학 교수가 되고, 남들 눈엔 번지르르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속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어. 안식년 핑계 대고 도망치듯 떠난 로마에서 널 만났을 때, 내 그 비참하고 실패한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 여전한 내 짝사랑이자, 학계에서 잘나가는 네 앞에서... 그냥 행복하게 잘 사는 유부녀인 척 연극을 한 거야. 그렇게 껍데기를 두르면 내 결핍이 감춰질 줄 알았어.“

 

서연의 눈가에 결국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근데 너랑 이탈리아의 그 아름다운 미술관들을 걷, 대화를 나눌수록... 내가 만든 그 거짓말의 성벽이 내 숨을 막히게 하더라. 널 향한 마음은 진심인, 내 신분은 가짜였으니까."


서연이 고개를 숙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민우는 거대한 역사적 대격변을 마주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 그러다 이내, 그의 입가에서 허탈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푸흡... 으하하하! , 진짜..."

"강민우? 너 지금 내가 우스워? 난 정말 큰 용기 내..."

서연이 서운함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으로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 하자, 민우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서연을 향한 깊은 미안함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안도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미안, 서연아. 네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내 꼴이 너무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그래."

민우가 답답하다는 듯 셔츠 깃을 풀며 헛웃음을 삼켰다.

"나도 이혼남이야. 이제 반년 됐어."

서연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 너 유연하고 쿨한 사모님 있다고...“

 

"쿨하게 각자 도장 찍고 남남 되기로 해서 쿨하다고한 거야! 나 역시 너한테 '실패한 늙은 이혼남'으로보이기 싫어서, 멋진 유부남인 척 온갖 허풍은 다떨었던 거라고. 네가 말한 그 '자상한 가짜 남편'을 질투하느라 내가 피렌체에서 밤마다 와인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아?"


두 사람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15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난 자리에서,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으려고, 잘 보이고 싶어서 쌓아 올렸던 거대한 거짓말의 성채가 장마철 빗물에 흙인형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휴, 난 그것도 모르고...! 피렌체 우피치에서 보색 대비니 뭐니 하면서, 우린 결코 섞일 수 없는 평행선이라고 혼자 얼마나 궁상을 떨었는지 알아?"


서연이 눈물을 훔치며 민우의 팔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울다가 웃어버린 그녀의 얼굴 위로 카페의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번졌다. 피렌체의 그 어떤 매너리즘 회화보다 훨씬 강렬하고 생명력 있는 색채였다.

 

민우는 웃음을 거두고, 테이블 위에 놓인 서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이번엔 주머니 속으로 숨기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단단하고 당당한 손길이었. 서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자, 그의 손바닥을 통해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심장까지 곧바로 전해졌다.


"서연아, 네가 우피치 미술관 트리부나 방에서 그랬. 보색은 정반대에 있어서 섞이면 검은색이 되지, 나란히 두면 서로를 가장 빛내준다고."

민우의 깊고 단단한 시선이 서연의 눈동자에 가닿았.

 

"근데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말이야, 암흑기 같던 중세가 끝나고 찬란한 르네상스가 올 때, 고대의 낡은 규칙들은 다 뒤섞이고 파괴되면서 시작됐어.

우리 인생도 각자 한 번씩 크게 깨지고 무너져 봤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보색으로 나란히 서서 눈치 보는 연극은 그만하자. 차라리 우리, 완전히 뒤섞여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색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서연은 제 손을 꼭 쥐어오는 민우의 손길을 느끼며,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사라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평생을 '완벽한 캔버스'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왔던 그녀에게, 민우의 거친 삶의 고백은 오히려 가장 완벽한 구원으로 다가왔다.

"좋아. 대신 이제 교수 타이틀 다 떼고, 15년 전 대학 교정에서 못다 한 연애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촌스럽고 유치하게, 그리고 숨김없이 뜨겁게.“

 

"당연하지. 내 앞으로의 모든 역사와 텍스트는 오직 너 하나로만 기록될 테니까."

어느새 거짓말처럼 장마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색빛 도심의 빌딩 숲 사이로 찬란한 오후의 햇살이 부서져 내리며, 카페 정원의 젖은 풀잎들을 황금빛으로 채워 나갔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위로 떨어지는 맑은 햇살. 탈리아의 뜨거운 태양보다 훨씬 따스한 그 빛 속에, 두 남녀의 진짜 '르네상스'가 비로소 아름다운 첫 붓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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