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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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희작가 댓글 1건 조회 115회 작성일 26-05-19 22:29본문
제목 : 미완(未完)의 불꽃
백자의 살결처럼 차가운 이슬이 내려앉는 가을 밤,
노화가(老畫家) 이석의 화실은 여전히 시간을 잊은 채 멈춰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수십 년간 그가 그린 산수화와 크로키들이
누렇게 바랜 채 벽지처럼 붙어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화선지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화선지 중심에는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용의 비늘 같은 껍질을 틀어 올린 채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지면을 뚫고 솟구칠 듯한 기세였으나,
이상하게도 소나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우측 큰 가지 끝은
붓 자국이 끊긴 채 하얀 여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선생님, 이제 그만 붓을 놓으시고 자리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의원이 새벽을 넘기기 힘들다 하지 않았습니까."
수십 년간 그의 수발을 들어온 제자 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먹을 갈던 손을 멈추었다.
이석의 안색은 이미 종이보다 더 창백했고,
붓을 잡은 손가락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형한 눈빛만큼은
화선지 위의 소나무를 꿰뚫을 듯 타오르고 있었다.
"문영아, 너는 이 소나무가 보이느냐?"
"예, 선생님의 평생이 담긴 역작이 아닙니까.
이제 저 가지 끝에 붓을 한 번만 대시면
마침내 낙관을 찍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화상의 무리들이 밖에서 수일째 백지 수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석은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더 거친 와중에도 피식, 헛웃음을 삼켰다.
"화상(畫商) 놈들…… 저들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돈을 본다.
완성(完成)이라는 두 글자가 찍히는 순간,
이 소나무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 박제된 가죽이 되는 게야.“
이석은 평생을 '완벽한 생동(生動)'을 찾기 위해 방랑했다.
젊은 시절에는 시대의 조류를 따라 서양의 세련된 화풍을 받아들이라는 권유도 받았고,
중년에는 대중이 좋아하는 화려한 채색화를 그려 부와 명예를 쥐라는 유혹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번잡한 도심을 떠나 이 외딴 산속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그에게 그림이란 단순히 사물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붓끝을 통해 화가의 영혼을 화선지에 주입하는 신성한 의식이었고,
그것은 타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전설이었다.
"선생님, 세상은 완성된 결과를 원합니다.
이대로 붓을 멈추시면 이 그림은 영원히 미완성작으로 남아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입니다."
"문영아, 세상이 말하는 완성이란 무엇이냐.
가두어 두고 획을 닫아버리는 것이 완성이라면, 나는 기꺼이 미완의 길을 택하겠다.
저 가지 끝을 열어두어야만, 밤새 바람이 불 때 이 소나무가 진짜 소리를 내며 울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벼루에 고인 검은 먹물을 응시했다.
묵직하고 깊은 어둠. 저 어둠 속에서 수많은 형태들이 태어났고, 또 사라졌다.
이석에게 이 그림은 평생을 바쳐 쓴 자서전이자,
결코 종결을 허락하지 않는 '탈고할 수 없는 전설'이었다.
마지막 한 획을 긋는 순간, 자신의 예술적 생명도,
그리고 이 소나무의 기운도 함께 소멸할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벽 두 시, 산바람이 문창살을 세차게 흔들었다.
방 안의 촛불이 길게 꼬리를 지으며 흔들릴 때,
이석은 평생을 쥐어 온 거친 늑대 털 붓을 다시 고쳐 잡았다.
문영은 스승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묵묵히 무릎을 꿇었다.
이석은 온 힘을 다해 붓에 먹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 화선지 위, 채워지지 않은 그 우측 가지 끝으로 천천히 붓을 가져갔다.
붓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약 1센티미터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먹 한 방울이 툭, 하고 여백의 공간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문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붓이 내려앉으면 마침내 전설이 끝난다.
그러나 이석의 눈에 비친 것은 화선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장엄한 독야청청의 소나무 숲,
그곳을 휘감아 치는 바람을 보고 있었다.
"아…… 바람이 부는구나."
이석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의 손에서 떨림이 멈추었다.
그는 붓을 내리찍는 대신, 허공을 향해 기운차게 붓을 휘둘렀다.
종이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획이 그어지고 있었다.
붓을 쥔 손이 그대로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먹을 머금은 붓이 화선지 옆 맨바닥을 가로지르며
검은 선을 남겼고, 이석은 눈을 감았다.
얼굴에는 평온하면서도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스승의 임종을 확인한 문영은
한참을 통곡한 뒤 정신을 차리고 화선지 앞을 지켰다.
방 안에는 여전히 짙은 묵향이 감돌고 있었다.
문영은 이석이 남긴 유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세간의 평론가들과 화상들이 새벽부터 마당에 모여
"드디어 완성되었느냐"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영은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소나무의 오른쪽 가지 끝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스승은 끝내 그곳을 채우지 않았다. 아니, 채우지 않음으로써
그 소나무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 것이었다.
"선생님, 이제 알겠습니다."
문영은 낙관을 들었다.
그리고 소나무의 하단이 아닌, 아예 그림의 바깥쪽 여백,
종이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도장을 찍었다.
스승의 예술은 이 종이 한 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이 방을 넘고 산을 넘어 저 무한한 허공으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문영은 화실 문을 활짝 열었다.
들이치는 거센 가을바람에 화선지가 파르르 소리를 내며 떨렸다.
그 순간, 문영의 눈에는 하얗게 비어 있는 그 가지 끝에서 푸른 솔잎들이 돋아나
거센 바람을 받아치며 파도처럼 출렁이는 환영이 보였다.
세상은 이를 미완성이라 부르겠지만,
이석이 남긴 집념의 예술은 완성이라는 감옥을 부수고
영원히 탈고 되지 않을 전설이 되어 그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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